사순절의 시작!
사순절의 시작!
사순절(Lent)이 시작되는 날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성령강림절까지가 크게 봐서 부활절 축제의 시작과 끝이 됩니다.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바뀌니까 그 날짜를 잘 거슬러 올라가면 사순절 날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이지만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매년 부활절을 그 해 춘분 이후 보름달이 뜬 날의 다음 주를 부활주일로 정했고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일요일(주일)을 제외하면 40일간이라서 사순(四旬)이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도 ‘40일(quadragesima)’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부활절 새벽에 세례를 받았고, 그래서 특히 그 이전 40일 동안 자신을 돌아보면서 금욕하고 아주 경건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요즈음에도 꼭 독실한 신자가 아니더라도 사순절이 되면 예를 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 정도 중단해보기도 합니다 (주로 커피나 초콜릿 안 마시고 안 먹기, 인터넷 사용시간 줄이기 등). 여기서 ‘40’이라는 숫자는 '기다림'의 수로 아주 상징적인 수입니다. 말하자면 준비하고 시험받는 기간인 것입니다. 한 세대가 바뀌는 것도 40년입니다. 특히 성경에서 보자면, 노아의 홍수 때 비가 40일간 내렸고,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40년을 광야에서 지냈고,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전에 시나이산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했고 (뒤에 또 40일간),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날이 40일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하시다 승천하셨습니다(예수 승천일). 부활절 이전 7일은 성 주간, 또는 고난주간이라고 해서 특히나 더 경건한 마음으로 일주일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절, 그리고 부활하신후 40일뒤 예수승천일, 그리고 부활하신 후 50일뒤인 성령강림절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기념하면서 축제처럼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축제는 왜 하는 것일까요? 축제는 무엇보다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입니다. 현대의 삶에서는 꼭 안 해도 일상의 삶을 꾸려나가는 데는 아무 지장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축제를 위해서는 의식이 필요하고, 또한 축제를 정점으로 모두가 함께 준비하려는 노력이 수반됩니다. 인간은 자연과 우주 질서에 다시 결합하려는 이러한 의식적인 행위를 매년 반복하면서 우리 삶 전체에 안정감과 함께 실제적인 리듬과 힘을 부여받게 됩니다. 따라서 준비하기는 힘들지만 막상 하게되면 많은 경우 모두가 그러한 힘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제를 위한 음식을 함께 준비하고 춤과 노래, 그리고 고유의 의식을 통해 나와 이웃을 만나고 서로를 보살피고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는 우주의 리듬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면서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과학과 통신, 운송의 발전과 함께 계절에 상관없이 사시사철 원하는 과일과 채소를 먹고 모든 종류의 꽃과 식물도 길러낼 수 있습니다. 수 많은 인공적인 빛으로 낮과 밤이라는 빛을 통한 하루의 리듬이 흩어져버리고, 한 주, 한 달, 한 해의 리듬을 통한 삶과 생명의 안정적인 리듬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인공 비까지 만들면서 날씨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예전보다 더욱 더 과학과 물질문명의 혜택을 통해 보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믿고 살고있으며, 아이들은 생명의 신비나 자연의 아름다움, 보이지 않은 힘에 대한 경외가 이전보다 확연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지 못하고 즉시 결과를 봐야하는 인스턴트 문화 안에서 배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여기 지상의 삶과 자신의 우주적 본성 사이에서 안정감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며, 지상적 존재 이외 우주적 존재로서의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특히 이러한 안정감과 소속감을 위해서 아직 삶에서 여러 해를 경험해보지 못한 어린 아이들에게 축제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쁨, 그리고 미래의 기대를 제공해주는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어른들 역시 이렇게 축제를 통해 리듬과 활력을 가지게 됩니다. 즉 변하지 않는 것, 고정된 것 (자연, 우주, 이치)과 매번 매년 변화하는 것 (나) 안에서 삶의 리듬과 삶의 예술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것을 맞이하기 위해 내면적인 준비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올해 사순절은 그러하였지만 내년에는 더욱 경건하게 하나라도 잘 지켜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부활절 축제 이외에도 인지학 공동체에서는 가능하면 함께 지켜나가려는 한 해 동안의 축제들이 있습니다. 많은 부분 서양 기독전통에서 지키는 일년 동안의 축제와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양사람들이라고 모두가 이렇게 지키는 것은 아니며, 같은 축제라도 인지학 공동체에서 찾고자하는 의미는 조금 다르기도 합니다.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축제의 주인공이 보입니다. 누구인가요? 축제를 이끄는 주인공은 태양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한 해를 보내듯 태양은 이끌고 지구 사람들은 이를 축하합니다.
지금은 대개 크리스마스이든 (서양의 경우) 부활절이든, 대게 당일이나 그 전후가 공휴일로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짧은 시간에 그 축제가 가지는 무드나 의미를 깊이 가져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활절 기간은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사순 기간을 포함해서 부활하시고도 50일 뒤 성령강림일 까지 꽤나 깁니다. 특히 성 주간, 고난주는 부활기간의 정점에 해당합니다. 부활절은 서양 기독교 전통가운데에서 가장 큰 축제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무엇보다 부활의 신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태양이 졌다가 다시 뜨고, 식물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보았지만 사람이 죽어서 부활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그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은 예수님의 두 번째 탄생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지구 안으로 태어나시고, 그리고 이를 지켜본 모든 우리 인간들의 몸 안에서 다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의 부활이 아닌 온 지구적인 부활이며, 인간만의 축제가 아니라 지구와 태양, 그리고 모든 동식물들이 함께하는 축제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인간뿐 아니라 지구 전체와 그 모든 생명체는 봄의 새로운 땅에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새로운 지구에서 살고 있고, 예수님의 부활을 몸 안에 간직한 사람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 위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을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또한 지구의 많은 동식물들이 새롭게 태어날 환경을 함께 만들어야 할 책임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질병이 음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물들과의 공존이 지켜지지 못할 때 우리는 지금 유행병과 같은 대혼란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나를 새롭게 인식하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명상으로 사순절과 고난주를 의식적으로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부터 부활까지의 8일은 마치 한 인간, 그리고 인류의 거대한 드라마를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불과 한 주도 되지 않아서 예수를 처형하다 라고 외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십자가를 세워 누군가를 희생재물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힘들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무엇보다 부활은 물질에 대한 정신의 극복입니다. 정신성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부활 예수는 무거운 돌 무덤을 헤치고 올라옵니다. 부활은 또한 다시 깨어남과 태어남입니다. 부활의 신비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만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