工夫기록장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들 (2)

Enkidu 2021. 7. 25. 14:18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들 (2)

Walter Holtzapfel의 Children's Destiny에서 일부 발췌 (치유교육 공부모임용, 번역: 이동민)


만약 우리가 자폐 아이들의 행동양식과 같은 분명 전례가 없던 것을 이해하려 한다면, 적어도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이미 알려진 현상들 속에서 무언가를 떠 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히스테리성 아이들의 경우 우리는 아이들이 닫힌 공간을 선호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하게 자폐성 아이들 또한 자신의 소아용 침대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거나 벽장에 숨고 싶어 한다는 등의 예를 통해 자신과 주변사이에 경계를 설정하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닫힌 공간에 대한 선호가 아이의 인접한 주위환경을 넘어 물체들로 확대될 때 이는 우리가 히스테리성 아이들에서 관찰한 것 이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주변에 대한 상세한 정보습득을 가능케 해 주었던 히스테리성 아이들의 민감함이 자폐 아이들의 경우 더욱 향상되어 텔레파시(정신적으로 감응할 수 있는)능력으로 바뀝니다. 이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실제로 가끔씩 놀랄 정도로 선생님의 마음을 잘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떤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그림 같은― 특히나 그 과목에 재능을 가진 선생님이 계실 때에만 그 능력을 보여줍니다. 한 번도 말하지 않은 11살짜리 소년의 선생님은 그 아이가 천부적 재능을 가진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타자기로 시를 써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했습니다. 우리가 돌보고 있는 8살 소녀가 분명하게 ‘오늘 엄마가 오셔’라고 말했는데 아주 멀리 살고 있는 엄마가 실제로 그날 왔습니다. 엄마는 이전 아무런 전갈도 보내지 않았고, 계획하진 않았지만 우연찮게 여행 중 잠깐 들러보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예를 통해 히스테리성 아이들에게도 보이는 이러한 능력이 이제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증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히스테리성 아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쉽게 상처받는 특성과 무언증이 자폐 아이들에게는 훨씬 더 심하게 나타납니다.

히스테리성 아이들은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일에 대해 일단 ‘난 할 수 없어(I can't do it)'라며 말하며 물러서는 특징적인 반응을 먼저 보이는데 ―하지만 나중에는 그 일을 잘 해냅니다― 자폐성 아이들의 경우 그 현상은 더욱 강하게 나타나 실제 능력이 있음에도 전혀 어떤 특정한 일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됩니다(apraxia: 운동불능증, 운동신경장애증 또는 실행증이라 불림). “우리 환자들 중 몇몇은 어렸을 때 식사시간에 수저를 쥐거나 또는 손을 뻗어 빵을 집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들은 아주 배가 고픈 경우에도 평소에는 물건을 집어 들고 잘도 만지던 그 손발의 능력을 이 경우에는 전혀 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부 부모들은 아이의 이러한 ‘고집’을 꺾어보려는 시도로 음식이 가득담긴 접시들 바로 앞에 아이를 앉혀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적인 시도는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마 그 때 부모님들이 제대로 판단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음식이 가득한 접시들을 옆에 두고 아이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겁니다.” 비록 이 아이들의 태도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다음 예로 들 아이의 경우 거의 우리에겐 불가해하게 보입니다: 이 작은 소녀는 오빠가 장난으로 자기 머리를 물이 담긴 큰 대야에 밀어 넣었을 때 다시 머리를 들어 올리지 않아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이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이 경우 머리) 생명이 없는 그리고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조종되는 하나의 물체로 간주하고 있는 것일까요? 때로는 외부의 다른 사람이 부르는 소리에 순간적인 반응을 보이며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한 10살짜리 소년은 언제나 사과를 좋아합니다. 자기 앞에 사과가 놓여있어도 누군가가 와서 집으라고 말하지 않으면 집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지시들이 필요합니다: ‘입에 넣어라’, ‘씹어라’, ‘삼켜라’. 또 다른 아이들은 지시가 없을 때까지 계단을 오르거나 문을 열거나 문턱을 넘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지시에 따라서만 행동하게 되는 자폐 아이들의 경우에서, 우리는 히스테리성 아이들에게서 관찰하였듯이 선생님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영혼이 위로받을 수 있었던 (soul-soothing)' 정도가 자폐 아이들의 경우 한층 더욱 강조되어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히스테리성 아이들이 보여주는 현상들을 자폐 아이들의 그것들과 동일선상에서 생각 가능케 해주는 많은 예들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설명될 수 있는 히스테리성 아이들의 행동이 자폐의 경우 너무나 확대되어 더 이상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아동 히스테리 증상을 죽음의 과정(process of dying)에 비유했습니다. 이것을 히스테리성 아이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원형적 상으로 생각한다면, 자폐 아이들의 행동은 실제 그 문턱을 넘어선 것으로 비유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비유를 할 때는 세심한 주의가 따라야 하고 무엇보다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스테리성 아이들이 정말로 죽어가고 있거나 예상되는 수명도 줄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사한 점은 영혼이 몸을 벗어나 주변으로 흘러나가려는 경향에 있습니다. 자폐 아이들은 우리가 죽을 때 나타나는 현상에서처럼 이미 정신세계로 가버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세상에 놓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비유가 어느 정도는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가해하고 접근조차 힘든 아이들의 상황은 그동안 여러 다양한 식으로 표현되어왔습니다: ‘유리공 안의 아이’ (Junker); '텅 빈 요새‘ (Bettleheim); ’낯선 세계‘ (Delacato).

자폐 아이들의 세계는, 진실로, 물체들의 세계이며 우리들 또한 그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와 아이들의 관계는 너무나 왜곡되어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선 세계입니다. 이 아이들이 가지게 되는 그 세계에서의 경험은 진정 정신분열증 환자가 환각과 망상의 세계에서 가지는 경험보다도 더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죽음의 세계, 물질-기계적이며 수학적으로 이해 가능한 법칙들이 존재하는 무생명적 물체들의 세계로서, 그 안에서는 더 이상 어떤 발전도 허용하지 않으며 동일한 것을 영원히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지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세계로부터 아이들을 벗어나게 하여 다시 인간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스테리성 아이들의 특성들이 더욱 발전되어 나타나게 된 형태로서 일부 증상들을 관찰했으며 자폐 아이들이 놓인 상황으로 접근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에서 벗어나는 다른 특성들이 있습니다. 한 예로 ‘대명사 뒤바꿈(pronominal inversion)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히스테리성 아이들의 행동에서는 유사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뒤바꿈 현상은 ’나‘와 ’너‘와 같은 대명사 전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너무나 자주 목격되기 때문에 이는 자폐증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들의 세계는 마치 뒤집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다를 뿐 아니라 과거 경험에 따른 우리의 예측과는 정반대인 것입니다. 우선 자신이 가진 능력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도록 합니다. 건강한 발달을 위한 모든 신체조건이 갖추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건강한 삶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아이들은 사람들에게서는 등을 돌리고 외부세계의 물체들과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사람‘과 ’세계‘의 역할이 서로 뒤바뀐 것입니다. 아이들은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을 때리거나 상처를 낼 수 있습니다. 반면 주변 환경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상당히 고통스러워합니다. 또한 자기 신체의 본성을 경험함에 있어서도 그 관계가 뒤바꿔 있습니다. 직립한 인간의 모습은 위와 아래, 가벼움과 무거움(중력)의 두 양극에 따라 방향 지워져 있습니다. 머리와 중추신경계는 가벼움 안에 있으며(뇌는 뇌척수액 안에 떠 있습니다) 중력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신체의 그 나머지 부분들 ―특히나 아치모양의 발― 은 중력의 요구에 적응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 역시 자폐 아이들에게는 뒤바뀌어 있습니다. 그 아이들 중 일부는 전혀 어려움 없이 몇 시간씩이나 계속 물구나무를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자세가 편한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다리를 들어 올려 중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거나 발끝으로 걷거나 돌아다니는 경향은 일반적입니다. Doris Weber는 다음에서 이러한 뒤바뀜의 아주 특이한 한 예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 중 Heidi는 세 살 때 (또한 몇몇 단어들도 때맞춰 말하기 시작했을 때) 음식을 씹을 수 있었으나 Brigitte는 4살 2개월이 되었을 때도 씹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Brigitte의 운동협응력(motor-coordination)은 매우 좋았으며, 한 예로 Heidi처럼 침대에 물구나무서서 오랫동안 있을 수 있었습니다. Brigitte이 자기 손에 사과나 비스킷을 쥐고, 뭔가를 씹고 있는 Heidi의 입을 오로지 뚫어지게 응시하는 일이 반복해서 목격되었습니다. 종종 Brigitte은 Heidi 손에 있던 사과를 갑자기 낚아채 자기 입에 넣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씁쓸한 탄식과 함께 다시 뱉어냅니다. 분명 Brigitte은 씹기를 원했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Brigitte는 Heidi로부터 사과를 집어 챘는데 이는 사과 안에 씹는 능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부‘과 ’외부‘, ’나‘와 ’세계‘가 서로 뒤바뀐 경우입니다: 씹는 역할의 당사자가 사람에서 외부세계의 물체인 사과로 옮겨진 것입니다. 시간상 순서가 뒤바뀌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일부 아이들은 읽기와 쓰기를 먼저 익힌 후에야(반면 어디에서 어떻게 그것들을 배우게 되었는지는 종종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비로소 나중에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자폐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모방하기 시작했을 때 ―이는 그들 발달에서 커다란 진전을 의미하는데― 그들은 종종 방향을 뒤바꾸곤 합니다: 그들은 예를 들어 위쪽 대신 아래쪽을 가리키고, 오른 팔 대신 왼쪽 팔을 움직입니다. 옷은 앞뒤 거꾸로 입고 신발을 좌우 바꿔 신습니다.

나와 너의 역할, 사람과 세계, 위와 아래, 안과 밖, 전후가 바뀌는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만약 이러한 비정상적인 반전 성향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신체조직 중 어떤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이 있습니다. 우리 신체조직 중에서 모든 것이 서로 뒤바뀌어 있는 영역은 실제 머리입니다. 뇌 역시 그렇게 형성되어 그 조직을 보면 위아래, 좌우, 앞뒤, 안팎이 모두 서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렇게 방향이 바뀌는 것은 신경들이 몸 전체에서부터 뇌로 들어오면서 그 신경들이 서로 교차하기 때문입니다. 신체 오른편에 대한 감각과 운동신경 중심은 뇌의 좌측부분에 있으며 신체 왼편은 뇌의 좌측부분에 있습니다. 신체 윗부분의 신경중심은 뇌 중심고랑(central sulcus)의 아래에 인접해 있고, 신체 아랫부분의 신경중심은 그 위쪽에 위치합니다. 가장 앞쪽으로 나와 있는 눈 조직은 뇌의 가장 뒷부분에 그 중심이 있습니다. 몸 전체를 가로질러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척수(spinal cord)의 경우 회백질(회색부분, grey matter)은 백질(흰색부분, white matter)에 둘러싸여 있는 반면, 뇌의 경우 반대로 회백질이 백질을 회색망토처럼 뒤덮고 있습니다.

뇌의 구조와 특정 아이들이 보이는 특성들과 같은, 서로 별개의 것들을 비교하여 유사점을 찾고자하는 시도가 가능한 것입니까? 우리는 각기 별개의 분야에 속하는 ―형태학과 심리학― 상반된 것들을 서로 비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사물들을 이해하기위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방법은 가능하며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시기의 건축양식에 대해 연구할 때, 우리는 건축, 회화, 음악, 시, 철학과 함께 당시 사회적, 정치적 상황들과 같은 다양한 분야를 추적 연구하며 적합한 방법들을 적용하려 합니다. 고딕양식 성당은 하나의 건축 양식이며 또한 하나의 형태학적인 현상이지만, 그렇게 지어진 양식을 통해서 우리는 고딕양식시대 전체에 넓게 퍼진 당시의 정신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폐 아이들의 행동 특성 안에는 뇌의 구조와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양식’이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얻게 된 지식을 통해,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자폐 아이들과 히스테리성 아이들의 행동을 비교하면서 인식한 내용들을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뇌는 거의 생명이 없습니다. 실제 뇌세포는 더 이상 증식하지 않으며, 따라서 병에 의한 상처나 손상의 경우 대체될 수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매일 수천 개의 뇌세포들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어집니다. 이러한 유기적인 조건 뿐 아니라 자체 저변에 내재된 초감각적 구조의 관점에서 뇌는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과 움직임 그리고 신체활동을 관장하는 인간의 초감각적 부분들은 머리로부터 물러나 있으며, 뇌는 인간의 의식이 반영되는 무생명의 반사경으로 남겨집니다. 이러한 구조는 머리에는 적합한 것이지만 자폐 아이들의 경우 어느 정도 이 구조가 몸 전체에 적용이 되었다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경우 초감각적 부분, 특히 자아는 물러나서 다른 세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 예로, 운동신경장애증(apraxia, 또는 실행증)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아이의 자아는 상당부분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육체를 통해 자기의지를 수행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머리는 자폐 아이들이 보여주는 공생적인 행동을 묘사해 줍니다. 머리는 신체의 나머지부분들과 일방적인 ‘공생관계’에 있으며 자신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받게 됩니다. ‘머리는 마차를 타고 있다’라고 슈타이너가 표현하였듯이 몸이 가는 쪽으로 이리저리 이끌리도록 자신을 허용하고, 감각의 느낌들 쪽으로 스스로 인도되도록 하며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대칭성이 강조되는 것 또한 머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머리와 그 기관들은 신체 다른 여느 부분들보다 더욱 대칭적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자폐 아이들이 전체적으로 머리의 특성을 취하고 있는 반면, 실제 머리 그 자체는 거의 무시된 것과 같습니다. 뇌와 뇌 연결 감각기관들은 기능적인 면에서 제한되고 달라집니다. 뇌손상의 경우를 통해 더욱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보지 않는다, 그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라는 잘못된 인상을 가지게 되는 경우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는 아이들이 자신의 감각기관들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는 다음의 예에 잘 나타납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관 그 자체는 전적으로 그러한 경험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오직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눈을 경험하지 않지만 그 눈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폐 아이들의 경우 그 반대로 눈을 하나의 기관으로 경험하는 경향을 보이며 반면 사물을 보는 눈의 원래 기능은 중요성을 잃어버립니다. 예를 들어 이 아이들의 상당수는 자신들의 눈을 가능한 한 위쪽으로 또는 옆쪽으로 굴려 시야 각도를 벗어납니다. 이로부터 생겨나는 압력과 긴장상태는 그들에게 만족감을 줍니다. 다른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안구를 눌러 유사한 결과를 얻습니다 (안구압박현상, digito-ocular phenomenon). 이러한 경험들은 시각의 영역보다는 촉각, 생명(생존)감각, (고유)운동감각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귀를 압박하는 경우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digito-auricular phenomenon). (참조. 루돌프 슈타이너, 1921년 7월, ‘Man as a being of Sense and Perception').

앞에서 물구나무서기를 언급하면서 머리 본연의 성질과는 반대로 무거움과 가벼움이 역전된 경우를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행동들을 ‘뒤바꿈 현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또한 눈과 귀의 경험이 전이되는 현상에서도 이를 발견했습니다. 자폐 아이들이 보여주는 현상들은 분명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으며 그것들을 통해 그 현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자의식이 형성되는 결정적 단계는 자기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는 시점입니다. 육화하는 자아(incarnating ego)는 자기 신체에 대한 저항을 통해 깨어나며 오직 자신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나’라는 단어로 자신을 가리키게 됩니다. 정상적인 아이발달의 경우 생후 2년에서 3년 사이 이 시기가 찾아옵니다. 깨어난 자아는 자신을 아주 강렬히 표현하며 이는 그 시기 아이들의 고집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반항의 시기’라고도 불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단계가 자폐 아이들의 경우 늦게 찾아오거나 드물게는 오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자폐 아이들의 자아는 스스로를 단단히 붙들지 못하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자아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자폐성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만 2세에서 3세 사이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자아가 자기 인식을 향한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아이들은 등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갑니다. Thomas Weihs는 이 상황을 ‘자아를 깨우려는 저항할 수 없는 갑작스런 공격에 대한 공포적인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건강한 아이의 ‘나’는 육체를 통해 바깥세계로 향하며 그 안에서 살아있습니다. ‘나’는 육체적 특성의 도움을 받아 ‘나’의 의지를 실현합니다. 신체기관을 통해 자연과 인간환경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내면적인 경험을 발전시켜나갑니다. 이러한 자아와 육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영혼에는 의문과 답, 즐거움과 슬픔, 나아감과 물러섬과 같은 경험을 위한 불씨가 제공되는 것입니다.

자폐 아이들의 경우, 자아는 스스로를 육체와 또한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경험의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며, 자아는 무생명적인 자연의 과정들과 관련을 맺습니다. 외면적 육체와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지는 사고, 감성, 행동과 같은 내면적 영혼의 특성들 사이의 조화로운 협력이 매우 심각하게 방해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 아이들은 너무나 이상하게도 감정이 없는, 무관심한 그리고 물러서 있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며, 표현하는 경우 그것은 물질적 세계의 변화들에 관한 것들입니다. 공허한 영혼은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을 한 무표정한 모조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 같아 ‘바뀐 아이(changeling, 또는 두고 간 아이)' 란 용어까지 쓰이게 되었습니다. (역자 주: 유럽에서 전승되는 이야기로, 요정이 예쁜 아이를 데려가서 자기 종으로 삼고 그 자리에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아이를 두고 간다는 내용). 의지의 경우, 수동성(passivity)과 동기부여 결핍을 통해 그러한 장애가 표현됩니다. 주목받고자 하는 노력이나 발전은 전혀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대한 어떤 장애가 이 아이들과 연관 있다는 사실이 종종 간과됩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종종 상당한 지적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관찰력 결함이나 언어사용 어려움의 요인들 중 상당부분은 실제 생각을 통해 바른 개념을 가지는 능력이 부족해서입니다. 우리가 주위의 다른 사물들 가운데에서 서로 관련성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생각을 통해서입니다. 생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혼란 상태로 남습니다. 자폐 아이들은 서로 관련 없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런 세계와 대면하며 그 세계 안 어디에도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Van Krevelen은 자폐 아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살아있는 생각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가 없는, 단조롭고 황량한 곳이라 이야기합니다.

C.Park는 한 자폐 아이의 엄마로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지식을 가지고 자폐증을 주제로 한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그녀는 자폐 행동을 이해하는 진짜 열쇠는 사고능력의 결핍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각각의 기본적인 경험의 조각들을 제대로 조합하지 못하거나 또는 하지 않으려는 것이 자폐 아이들의 실제 가장 큰 장애입니다. 이러한 장애는 감각기관에, 언어사용에, 신체활동에, 그리고 감성적인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폐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생각을 종합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사물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말하고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힘이 듭니다. 주로 전치사나 접속사와 같은 짧고 사소한 단어들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and(~와)’로 연결되는 가장 단순한 조합을 익히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특히 ‘under', 'over', 'yesterday', 'earlier' 등과 같이 공간이나 시간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훨씬 더 어렵습니다. 또한 ’truly'나 ‘in spite of'와 같은 철학을 함축한 단어들은 (Jean Paul의 말에 따르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개념들은 그들에게는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언어생활에 잘 나타나는데 이는 말하는데 결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F.Affolter는 아이의 발달과정 중에서, 처음에는 시-공간상에 분리되어있는 지각의 대상들(percepts, 지각표상들)이 어떻게 서로 밀접한 결합을 이루게 되는 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였습니다. 만약 자폐 아이들이 그러한 결합을 이루어낼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지각능력의 결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인식하는 과정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장애가 있는 부분은, 사고를 통해 얻게 되는 개념의 결과로서의 인식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인식이 나아가야할 길에 이러한 이해의 장벽이 놓인 것입니다. 소리를 듣고도 아이가 뒤돌아보지 않은 것은 소리를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이는 그 소리를 다른 생각들과 연관 짓지 못하고,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이 또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C.Park는 책의 끝 부분을 향해가면서 자신의 자폐증 아이 Elly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내려갑니다: Elly가 보이는 증후에 대해 어떤 기술적인 용어가 적합한 지는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단 한 용어는 분명히 여기에 적용될 수 없습니다. 제 아이는 “미친 것이(deranged)" 아닙니다. 종종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 발생하고 그러한 것들이 이 아이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하지만 더욱 더 자세히 관찰할수록 더 잘 내 아이를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관찰해야 할 더 많은 것들이 아직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더욱 더 내가 어떤 일탈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함을 다루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나사“가 ”느슨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입니다.‘ 위의 글을 통해 우리는 자폐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중대한 변화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여러 증상들을 보면서 우리 생명체를 단단히 결속시켜주는 이 ’나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중심부, 즉 ’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나‘라는 것은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너무나 멀리에 있고 또한 본래의 길에서 너무나 많이 벗어나 있어 거의 닿을 수가 없습니다. 자폐 아이들의 ’나‘는 인간의 영역으로부터 돌아서있으며 조심스럽게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치료의 우선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이의 자아에 크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단어의 형성력입니다. 비록 아직 그 아이가 말을 할 수 없다하더라도, 아이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각각의 단어들을 명확히 발음하여 말하며, 아이에게 좋은 산문이나 시를 들려주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만약 아이가 말하는 법을 배웠다면 아이가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동작 언어(gesture language)’를 구사하면서 말을 병행하는 방법은 특히나 효과적입니다. 아이의 영적인 필요에 의해 종교의식에 참가할 수 있다면 이는 아이에게 치유적인 효과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각적인 언어’로써의 유리드미는 여기서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자아는 24시간 리듬 안에 살고 있습니다. 의미 있게 짜인 매일 일과에 지속적으로 반복 참여함으로써(기숙학교에서만 가능하겠지만) 자연스럽게 ‘나’가 거기에 편입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됩니다. 아침과 저녁의 축복의식을 통해, 오전의 활기찬 수업을 통해, 오후의 편안한 문화 활동을 통해 다양한 시간대의 특성들은 더욱 강조되어 집니다.

자아는 온기 속에 삽니다. 자폐 아이들은 온기를 느끼는 경험에 장애가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추위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충분히 따뜻할 정도로 옷을 입었는지 확인해줘야 합니다. 따뜻한 목욕이나 또한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는 특별한 치료목적의 목욕도 큰 도움이 됩니다. 아이가 약간의 열을 가지고 있을 때 아이 몸 상태는 더욱 향상된 것을 종종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의지 속에 살고 의지는 순간 속에 삽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또한 유리드리는 반드시 받아야 할 필수불가결한 도움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역시 아이들이 의미 있는, 영혼이 담긴 동작을 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인간의 형태는 자아조직(ego-organization)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계속 이 아이들이 자신의 몸 형태에 대한 어떤 개념이 많이 부족함을 알게 됩니다. 사람을 그리려고 할 때도 신체 각 부분들을 이어서 붙일 뿐 전체적인 형태를 만들지 못합니다. ’너의 왼쪽 귀를 보여줘‘, ’너의 오른쪽 손으로 왼쪽 발을 잡아라‘ 등과 같은 ‘신체-지형(body-geography)'을 이용한 조직 훈련(systematic exercise)은 아주 유용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훈련들을 수행하고자 하는 노력은 강렬할 수 있으나 그 강도가 결코 아이들에게 직접 향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이 아이들을 똑바로 겨냥해서 또는 거칠게 불러서는 안 되며 그 아이들의 눈을 꿰뚫어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자아와 매번 대면하는 것이 이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또 다른 공격이 되며 이로부터 아이들은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합니다. 자아는 너무나 멀리 있어 마치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러한 자폐 아이들의 경우, 직접적인 대면은 급격한 결과를 초래하며 무방비 상태인 아이에게 상처를 입을 수 있으며, 따라서 치료발달로부터 아이들을 더욱 뒤로 물러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현실적이고 차분한 그리고 ‘모든 감정들을 제거한(asperger)' 상태에서 교육자는 아이 옆에 나란히 서서 아이의 자아가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