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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은 인간의식의 발달 전반을 통해 세 가지 인류의 위대한 이상으로 표현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상들은 그 자체의 숭고한 본성을 통해 인간의 삶 안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인식되어왔습니다. 이 세 가지의 이상들은 현 문화기 이전에는 지금처럼 추상적이지 않고 좀 더 구체적인 실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 R. Steiner
위의 세 가지 위대한 이상은 현재 많은 교육기관에서도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당연한 교육 목표나 모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되었듯이 후기 아틀란티스 다섯 번째의 우리의 현 문화기에서 그 이상들은 조금 더 추상적이고 모호해지면서 여러 가지를 다 포함하면서 광범위해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물질육체는 가장 오랜 기간동안, 고대 토성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발전해왔습니다. 우리의 물질육체는 정신세계의 고차적 존재들의 도움을 통해 지금의 정신적 형태의 물질육체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 안에는 그 존재들의 의도와 진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생각할 때 물질육체가 가진 느낌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미묘하게나마 이것이 내 몸과 어떤 조화를 이루는지 명상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또 다르게 말하자면 현재 자신의 물질육체와 나의 지상의 삶 이전의 존재, 그리고 더 높은 고차적 존재와의 모든 연결을 느끼게 됩니다. 지상의 나는 정신적 존재가 물질육체로 현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실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진리적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생각을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임을 거부하고 지구의 삶 이전의 존재와 연결의 끈을 잘라버리는 것이 됩니다. 단단하고 확고한 지적인 의식만으로는 그러한 단절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끈이 사라지고 정신적 존재와의 연결에서 실제 너무나 많은 환영에 빠지기 쉬운 이유가 됩니다. 끈이 잘라진 경우에는 우선 물질육체, 특히 감각계의 체질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는 진정한 실제(true reality)의 투영(copy)에 불과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실제를 알기 위해서는 정신세계와의 연결이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연대는 진리와 진실됨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 강화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육체와 진리의 이상과는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물질육체가 자신에게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 못하면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건강이 나빠지고 병을 앓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진리를 향해 매진할 때 우리는 특히 아이와 청소년을 둘러싼 환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환경적인 면에서 실제와 현실, 그리고 진정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역사 전반을 걸쳐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짧은 시기에 이렇게 많은 경험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이제 이것보다는 '어떤 것'이 실제로 '그것'이라고 믿게 되고, 실제로 그것을 모방하거나 그것으로 대체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물론 실제 현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상당히 다를 때, 그렇게 배운 ‘진리’가 실제로는 다르게 보일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게 진실을 대신하는 것이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이 감각에 미치는 복합적인 영향의 결과를 좀 더 주의 깊게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한 한 예를 들어보자면, 많은 식품에서 실제가 아닌 과일(예로, 포도) 맛을 내는 향료를 사용합니다. 소화 과정은 음식을 섭취하는 입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이러한 '가짜' 포도 맛을 입에서 접하는 순간 우리의 뱃속에서는 진짜 포도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진실한 물질육체가 이러한 화학적 대체물을 받게 될 때, 즉 결국 '진실되지 않음'을 반복적으로 강요될 때 해당 장기들은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외에도, 주변을 가득 채우면서 쇄도하는, 너무나 흔히 접하게 되는 ‘완벽’에 가깝게 정제된 전자 사운드, 영상과 이미지 등은 아이와 청소년들의 진실과 가상, 실제와 대체를 혼돈하게 할 여지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 차이를 구분하겠지만, 그리고 가상에서의 진실은 ‘가상적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지면 다행이겠지만, 그 경계는 상당히 취약하면서도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우리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착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이는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큰 도전거리가 됩니다. 또한 현재의 메타버스 기술력과 주변의 반응을 잘 살펴본다면 결코 이러한 도전에 쉽게 대항하지 쉽지 않음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진실되지 않음’은 우리가 실제와 가상이 혼돈되고 가상을 거의 실제와 같이 취급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상으로 내려오기 바로 전에 에테르체를 획득하게 됩니다. 에테르체의 실제에 대한 느낌은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을 통해 강화됩니다. 높게 발달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형성력을 가진 에테르체와 적절한 관계를 만들어 줍니다. 예술의 예를 통해서 본다면 그 중요성이 좀 더 명확해집니다. 우리는 조각, 그림, 드라마 등을 통해 우주를 담은 인간을 묘사하고자 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높이 발달하게 된다면 이는 에테르체를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주로부터 에테르의 힘을 끌어와서 지상의 에테르체를 형성해갑니다. 인간은 예술 없이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가진다는 것은 에테르체의 실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전에 접근할 때, 또는 그 안에서 신의 조각상들을 볼 때, 그들은 내적으로 이글거리는 온기, 내적인 빛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힘들이 자신 안으로 들어와 각기 다른 장기로 침투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즉, 이러한 아름다움의 인식은 곧 에테르체 안에서 경험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추함에 있어서도 고대 그리스인의 느낌은 현대인들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현대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추상적 느낌 정도를 표현합니다. 추함은 당시 그리스인들 몸 전체에 으스스함을 던져주었고 피부 모공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대에는 이렇게 에테르체의 실제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단지 우리의 무의식에만 남아있고, 이성적인 지성, 추상에 대한 애정과 함께 모든 것을 머리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진실에 대한 열정을 통해 가지게 되는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기쁨을 다시 제공해줍니다. 잘못된 것은 바른 것을 향해서 가는 아름다움, 무너진 신뢰가 다시 쌓이는 아름다움,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작품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내적 변형이 이루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추함’, ‘고통’, ‘죽음’ 등으로 인식하는 것을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면모시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진정한 느낌은 지상의 삶 그 자체, 그리고 지상 이전에서의 존재와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줍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 교육과 사회적 환경에서 이러한 연결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산업화된 도시와 기계적 문명, 그리고 아름다움이 결여된 환경은 인간이 지상 이전 존재와의 연대를 망각하게 만드는 다른 존재들에게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주게 됩니다. 정신세계는 항상 존재하지만 우리가 진리와 진실됨으로 불타오를 때, 우리 가슴이 아름다움으로 떨릴 때 우리 무의식 심연으로부터 지상 이전의 영적세계와 연결고리가 맺어집니다.
인간은 어떻게 지구 이전의 실재와 연결할 수 있는 힘을 발달시킬 수 있을까요? 답은 우리가 선함으로 가득 차 있을 때입니다. 즉, 자기이득에만 국한되지 않고 타인으로 흘러 들어가는 선함, 그리고 자신안에 내재된 선함을 의식하는 그런 때입니다. 진정한 선을 행함은 반드시 가슴영역의 힘을 포함해야만 합니다. 이는 진정한 동료애, 대가를 바라지 않은 선함, 소유하지 않고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는 조건 없는 그러한 사랑의 힘을 의미합니다. 선함은 우리의 아스트랄체와 직접 연관되어 있습니다. 선함은 단지 선하다는 것 이상으로 사랑스러운 자비로 그러한 행동을 실제 실천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한 동기에서 무언가를 행한다면 깊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을 진정으로 깊이 공감하면서 그 자체로 도움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영혼도 더욱 건강해집니다.
따라서 진리는 물질육체와, 아름다움은 에테르체와, 선함은 아스트랄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많은 경우 전통에 따라, 또는 처벌이 두려워서, 아니면 그러지 않으면 덜 존경받기 때문에 선행을 펼치기도 합니다. 물론 대개는 순수한 선한 사랑으로부터 선행을 행하겠지요? 그러한 선함의 경험은 항상 아스트랄체의 실체를 경험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이러한 실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선험이란 공허한 추상적 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의 문을 넘어서도 견디어 낼 그 힘은 선한 삶을 살았을 때 가지게 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정신과 연결된 하나의 상을 만들어내고, 내면의 힘으로서 우리가 발달시킨 그 선함을 통해 그 끈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됩니다.
선함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안정감을 제공해줍니다. 두려움은 아스트랄체의 건강한 발달을 저해합니다. 만약 그러한 발달에 지장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어책들을 우리에게 드러낼 것입니다. 이는 무력감, 거부감, 지나친 의존, 수동적 저항 등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하다면 만성적인 불안, 우울증, 정서적 무감각 같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진실됨이란 우리의 정신적 과거와 잘 연결됨을 의미하고,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물질세계에 살면서도 정신과의 연결을 지속한다는 것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미래의 정신세계를 위해 살아있는 씨앗을 만드는 것이다. 진실되지 못한 사람, 즉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적 과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사람은 지상에서 정신의 태양이 비치지않는 곳에 거주하고 정신이 없는 곳에서 떠돌게 됩니다. 선함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적 미래를 지레 단념하는 것입니다. 슈타이너는 생애 첫 7년 동안 아이들은 세상이 선하다고 경험하는 적절한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한 환경을 통해, 아이들은 세상에서의 심리적 안정감, 온기, 영양과 같은 신체적 필요, 무엇보다 주변 사람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같은 보살핌이 제공됩니다. 이 선함은 그 자체가 진실이고 실제입니다. 따라서 진리와는 불가분으로 서로 묶여 있습니다.
괴테아눔에 가보면 슈타이너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잘 함축된 하나의 작품 – The Representative of Humanity-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세 가지 존재를 보게 됩니다. 루시퍼와 아리만, 그리고 그 가운데에 인간(그리스도)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위에서 날개를 달고있는 '선'과 저 아래 지하동굴에 누워서 버티는 '악'을 묘사한 양 극단과, 그리고 그 사이에 당당히 서 있는 한 신적 존재를 표현한 종교적인 작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선이란 무엇인가요? 아주 오래 전 위대한 사상가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이란 악의 반대가 아니라고 합니다. 선이란 다만 두 개의 양 극단 사이에서 우리가 이루어내는 '균형'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용기가 비겁함의 반대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무모함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용기(무모함)와 너무 적은 용기(비겁함)의 사이에 중용으로서 용기가 존재하게 되고 이를 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습니다. 용기 이외에도 다른 모든 미덕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선은 항상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것 사이에 있습니다. 어떤 물질이 우리에게 독이 될지 아니면 치료제가 될지를 결정하는 것 역시 적절한 양입니다.
진리와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은 인간이 열망하는 위대한 이상으로 이는 인간의 심오한 본능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 시대에 이러한 이상들은 서서히 빛을 잃은 단어들로 사라져갑니다. 이러한 이상에 굳건한 실재를 불러들이는 일 또한 현 문화기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참고문헌.
Truth Beauty and Goodness - Rudolf Steiner
A Passionate Schooling: Key Ideas Behind Steiner Waldorf Education - Mazzone, Alduino
Human Organs – Walter Holtzapf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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